아홉 송이 수선화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철이 없었다.
모내기를 앞둔 석양의 들녘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지만 나는 마루에 앉아 빨리 어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 봄, 나는 처음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군인들이 마을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며, 그 군대를 이끄는 대장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 봄이 ‘서울의 봄’이라는 것과 마을앞을 지나던 군인들이 내가 생각했던 군인이 아니라 진압군 이었다는 것을 대학에 들어와서 알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지가 잘린, 피로 범벅된 시신들의 사진을 보며,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 자기마을엔 탱크가 지나갔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의 삼촌이나 형 또는 누나였을지도 모를 그들에 대해서 오랬동안 이야기 하고 생각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내가 접했던 수많은 봄을 보내고 올해 또 다른 봄을 보낸다. 그 봄은 “꽃향기에 가슴 설레며, 가슴 설레는 것을 아파하던 때로부터 멀리 떠나왔다. 잘가라는 인사도 없이, 잘 있으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 없이 우리는 그 시절과 이별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아쉽고 서운하고 서러웠다” 말하는 공선옥님의 말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아홉송이의 수선화로 시작되는 소설은 세송이의 수선화를 떠나 보낸다. 슬픔으로 가득 찼던 1980년대의 군사독재와 518, 그리고 노동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이들이 가장 예뻤을 때다. 518의 총탄에 죽은 경애, 그 죽음을 자책하며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 나는 너무 이상해,…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게 아닐까?”라고 자책하고 자살하는 수경, “적어도 세상에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널려 있는 한 나는 가난하게 살 거”라며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으로 간 정원과 그의 뒤를 좇은 여동생 정신, 승규, 해금 그리고 민들레 집에 다니는 환, 항전파인 훈과 투항파인 윤 형제의 갈등 등, 그들의 삶이 치열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예뻤을 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처럼 그들의 눈물 때문에 그들이 더욱 예뻤을 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정권에 저항하고 노동착취와 탄압에 저항했던 이들의 슬픔 때문에 세상이 좀더 아름다워 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이세상에 양심에 대한 핍박, 가난, 차별, 자본의 횡포 등 수많은 슬픔들이 존재하지만,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작가가 그 시절과 이별하는 것이 너무도 서럽고 아쉽고 서운하다고 말한 것처럼 아직 그 시절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지 안았다. 아마 우리는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먹고, 잠 잘자서 미안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러나 작가는 슬프고 가슴아픈 주제를 우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맑고 경쾌하게 우리의 아픈 부분을 이야기 함으로서 보다 깊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참 예뻐야 할 나이의 눈으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서 형이나 누나와 같은 친밀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Memoi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0) | 2010.12.06 |
---|---|
압록강은 흐른다 (0) | 2010.12.06 |
2MB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0) | 2010.10.22 |
섬진강기행 (0) | 2010.10.22 |
바보 노무현의 죽음 (0) | 2009.05.23 |